[요12:20-33, 새번역]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그 기도가 그 이전에도 드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도 어떻게든지 피하고 싶은 고통이었던 것이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누군가의 고통을 느끼고 아파하는 것은 나도 내가 겪었던 그때의 고통이 내 마음에, 내 육신에 흔적처럼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함께하시며 위로하시고 견딜힘을 주실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마음의 아픔과 걱정이 떠나질 않는다. 이제 나의 기도도 변하여... 이 고통을 줄여주시라고... 내 어머니를 품고 드렸던 그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 너무 놀랍고 놀라운데, 내가 감히 경험해 볼 수도 없는 고난과 고통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가운데 걸어가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 은혜는, 너무 감사해서 그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마음에 사무친다.
이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늘 보좌에 계시는 데도,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5:6), 주님의 몸에는 여전히 손과 발, 옆구리에 그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 예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24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단다.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 네가 걷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란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육신은 고난을 당하나 그 믿음이 꺾이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우리를 세상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믿음이 고난 중에 자란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빌립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요 12:21)
문득 이들의 요청이 단순히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이 장면을 읽다 보면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 요청에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다소 쌩뚱 맞은 듯한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마치 헬라인들의 요청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말씀처럼 보여집니다.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이 장면이
단순한 만남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이스라엘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요청을 들으시자마자
자신의 때, 곧 십자가의 때를 말씀하시며
한 알의 밀알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 밀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구원은 한 민족 안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사건이라는 것이
다시금 깊이 깨달아지는 아침입니다
헬라인들의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대해
단순히 대면을 통해 보는 것을 넘어
더 큰 일을 바라보게 하시고자 했던
예수님의 대답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렇게 묻고 계신듯 합니다
"너가 보고자 하는 예수의 모습이 무엇인가?"
라고 말입니다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붙잡기 위해 찾는 예수인지
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닮기 위한
몸부림인지 말입니다.
부디 저의 마음에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닮기 위한
소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방 사람들이 찾아올 만큼 유명해졌을 때 예수님이 '죽음의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많은 생명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아시기에 괴로워하셨지만,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시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명이고 구원의 완성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 이 땅에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죽여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되고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내가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일'이 무엇인지? 삶의 자리에서 찾아보고 실천하겠습니다.
나의 헌신이 한 알의 밀알에 불과할지라도, 생명을 살리는 부흥의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말씀묵상] 요한복음 12:20~33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위 말씀에서 자기의 생명의 사랑하는 자와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안락함과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실제로 자기의 생명을 경히 여긴다는 뜻이 아닌 삶의 우선순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우선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요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 그리고 공의를 추구할 때 비로서 영원의 생명이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 세상의 온갖 일로 인해서 어지럽고 정돈되지 못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그 안에서 참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끄시는대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못된 나의 자아를 깨뜨리고 주님 주시는 진리로 자유함을 누리는 그런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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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제가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의 욕심을 다 채운 이후에 주님의 뜻과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사모함으로 주의 일을 가장 우선하는 지헤로운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이를 통해 주어질 마음의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알의 밀알이 죽어야~~
예수님은 앞을 아셨다.
아셨지만 그 길을 가시기를 피하지 않으셨고
나라는 인간도 복음을 접할수 있었다.
말씀을 통해 나에게도 밀알 처럼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목소리를 높이는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죽는
것이 사는것이라 말씀하신다.
결코 쉽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복음에 빚진자로
반드시 이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임을 묵상을
통해 안다.
죽어야 사는 운명 이것이 제자된자로서의
사명 아닐까 한다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서 그이름을
붙들고 복음에 빚진자로서 살게하옵소서
예수의 걸음을 열심히 쫒아가게 하옵소서